드보르자크_소박하고 정감있는 작품


▒ 안토닌 드보르자크_Antonin Dvorak

안토닌 드보르자크(Antonin Dvorak)은 체코의 흙냄새 나는 소박하고 향토적인 서정성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린 드보르작은 체코 민족주의 운동 한가운데 있으면서 슬라브적 요소를 작품 속에 녹아내어 스메타나의 국민악파 정신을 계승 발전시킨 인물이다.

▒ 오르가니스트 리만(Antonin Leihmann)을 만나다

드보르자크(Dvorak)은 프라하 근교에서 여관과 정육점을 하는 아버지와 그 고장 영주의 성을 관리하는 집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나타냈지만, 가업을 잇기를 바라는 부친은 그가 독일어를 배울 수 있도록 가까운 작은 도시 즈로니체로 보냈고, 그곳에서 드보르자크(Dvorak)은 음악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독일어 교사이자 오르가니스트였던 리만(Antonin Leihmann)으로부터 바이올린, 비올라, 피아노 등을 배웠는데, 가업을 잇게 하겠다던 드보르자크의 양친을 설득한 것도 그였다.

1857년 프라하로 나온 드보르자크은 오르간 학교에 다녔고 졸업 후 카를 콤자크(Karl Komzak)가 이끄는 작은 밴드의 비올라 주자, 그리고 레스토랑 연주자로 활동했다.

▒ 체코의 혁명가이자 작곡가 스메타나

1859년 이탈리아에 패전한 오스트리아가 체코 민족에 대한 억압을 완화하자 프라하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이 일어났다. 1860년대 초기 체코 국민을 위한 가설극장이 열려 이곳 관현악단에서 1862년부터 1871년까지 10년 동안 비올라 주자로 있다가, 1866년 스메타나가 지휘자로 부임하면서 드보르작에게 전환기가 찾아온다. 스메타나는 당시 민족주의 국민음악을 일으키기 위해 많은 곡을 쓰고 있었는데, 드보르작은 스메타나로부터 배우며 민족음악에 귀를 열게 된다. 이 무렵 그는 얼마 안 되는 보수와 피아노 레슨으로 어렵게 생활하며 작품 창작을 하고 있었다.

드보르작은 피아노를 가르치던 체르마트의 딸 요세피나(Josefina)를 사랑했으나, 요세피나가 얼마 뒤 코우니츠(Kounic) 백작과 결혼하는 바람에, 동생인 알토 가수 안나 체르마코바(Anna Cermakova)와 1873년 결혼했다.

▒ 드보르자크의 재능을 알아본 브람스

오스트리아 정부가 고전하는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경연 대회에 1875년부터 5년 동안 매해 작품을 출품, 그 보조금을 받게 되는데, 심사위원 중엔 브람스도 있었다. 브람스는 이 젊은 작곡가의 재능을 눈여겨보아 1등 상을 수여했고, 그를 널리 알리는 가운데 자신의 작품을 출판한 출판사에 소개해 1878년 8개의 관현악 모음곡 <슬라브 무곡집>이 출판된다. 이 작품은 드보르자크에게 국제적 명성을 안겨주었다. 이때부터 런던과 뉴욕 등지에서 그의 작품이 연주되기 시작했으며, 1884년부터 1896년 사이 9번에 걸친 영국 방문은 헨델 이후 처음이라고 할 정도의 대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1891년 케임브리지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다.

▒ 드보르자크의 고향_프라하의 향수

1891년 뉴욕의 새 국립 음악원 원장 자리를 제의받아 1892년 봄 미국으로 건너가 3년을 지냈다. 이 신대륙에서 받은 영감은 그의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여기엔 새로운 세상에 대해 놀라움보다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 진하게 묻어나오고 있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영감과 조국에 대한 애정이 절묘하게 섞여 있는 이 작품은 그가 프라하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 시기 인디언 음악으로 채색된 작품들도 있으나, 이것은 민속 음악이라는 동질감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지 단순히 이국정서에만 매료된 것은 아니었다.

드보르자크은 슈베르트와 같은 다작의 작곡가여서 그의 작품 중엔 옥석이 뒤섞여 있으나, 그가 남긴 소박하고 정감 있는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가장 널리 연주되고 있다. 1904년 신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드보르자크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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