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_위대한 낭만주의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Story_Ackli™

▒ 브람스_Johannes Brahms

19세기 가장 중요한 교향곡 작곡가이자 독일 낭만주의 음악계 위대한 작곡가인 브람스는 낭만주의 시대 몸을 담고 있었으나 고전파 양식에 기초를 두고 추상적 형식의 작품을 썼으므로 신고전 악파로 불린다. 시시때때로 바그너와 정반대 인물로 비교 평가받는데, 바그너가 미래지향적이지만 브람스는 고전주의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바그너는 브람스를 가리켜 태고의 유물이라 혹평했고 심지어 그가 22세 때 쓰기 시작한 교향곡을 21년이 지난 43세 때 완성하자 교향곡은 베토벤에서 이미 끝났는데 무슨 교향곡이냐고까지 했다. 그러나 바그너의 이 말은 음악사에서 오히려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브람스를 대변하는 말이 되고 말았다. 브람스는 바흐와 베토벤, 특히 베토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가 교향곡 작곡을 이처럼 늦춘 것은 베토벤의 영향이 너무도 큰 탓이었다. 교향곡을 쓰려 하면 뒤에서 베토벤이 보고 있는 것 같다 고까지 했을 정도였는데, 실제로 그의 교향곡 제1번은 베토벤의 냄새를 짙게 풍긴다. 그러나 그가 발표한 4개의 교향곡은 베토벤에 필적하는 대우를 받고 있으며 중요한 연주 목록에 자리하고 있다.

브람스의 아버지 요한 야콥은 함부르크 시향에서 더블 베이스를 연주했고, 그의 어머니는 브람스 가정의 가정부 일을 했던 어려운 중산층 출신으로 아버지보다 17살 연상이었다. 

▒ 브람스와 슈만의 만남

브람스는 아버지에게서 음악을 배웠는데, 7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워 1848년 첫 연주회를 열었다. 1853년 헝가리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Eduard Remenyi)와 독일 여러 지방을 돌며 연주회를 했고, 5월 말 하노버에서 알게 된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Joseph Joachim)과 우정을 쌓아 이후 그에게서 슈만을 소개받는다. 슈만은 브람스의 재능을 바로 알아보고 당시 그가 창간했던 음악 신보에 새로운 길이라는 제목으로 브람스를 소개한다.

1854년 2월 슈만이 라인강에서 투신하자 슈만이 죽는 날까지 그를 돌보며 그의 가정 또한 보살폈다. 그러면서 클라라 슈만에 대한 애정이 싹터 평생을 흠모하며 독신으로 지낸다.

▒ 어머니를 잃은 슬픔으로 작곡한 "레퀴엠"

1864년 부모의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간 브람스는, 병상에 있던 어머니를 아버지가 돌보려 하지 않자 괴로워한다. 결국 그의 부모는 이혼했고 1865년 1월 어머니가 세상을 뜬다. 그러나 이 충격은 오히려 촉진제가 되어 1868년 <독일 레퀴엠>을 발표, 그에게 커다란 성공을 안겨주었다.

1872년부터 1875년까지 빈 악우협회 총무를 역임하며 정기 음악회 결정권을 가지게 되지만, 정작 창작 시간이 모자라 조용하고 시원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작곡하는 버릇을 가지게 되는 데 말년까지 지속한 이러한 습관은 그에게 중요한 작품 목록을 만들어 주었다. 1876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주겠다고 통보해 왔으나 브람스는 직접 참석해야 할뿐더러 갈 시간도 없어 이 제의를 거절했다. 1879년 3월에는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명예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아 그 답례로 <대학 축전 서곡>을 쓴다. 이 무렵 친구 요아힘이 이혼하려 했는데 브람스는 그의 부인 편을 들어 결국 브람스와 요아힘의 관계는 깨지고 만다. 그러나 1887년 브람스가 요아힘과 첼리스트 로베르트 하우스만(Robert Hausmann)을 위해 2중주 협주곡을 써 다시 화해한다.

▒ 브람스가 평생 사모하던 클라라 슈만

1896년 5월 평생 사모하던 클라라 슈만이 세상을 뜨는데, 이때 이미 그 불안함으로 브람스는 <4개의 엄숙한 노래>를 썼었다. 클라라의 장례식과 비탄은 그의 건강을 악화시켰고, 진단 결과 부친과 같은 간암으로 판명, 결국 1897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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